[수록곡]1. invitation to sweet dream
2. shape of love
3. when you feel love
4. gentle longing
5. encounter like juliet's
6. that is love
7. in a gentle time
8. love goes gracefully
9. sonnet of setting sun
10. sentimental moment
11. emerald lake
12. nostalgic road
순수의 피아노 (pure piano)글 : 유키 구라모토
피아노! 그 음색을 처음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직접 피아노라는 악기를 만져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5월쯤이었을 것이다. 그 피아노는 내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선생님 댁에 있는 것이었는데, 보통 연주하는 음역보다 훨씬 높은 음과 낮은 음의 건반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피아노가 흰건반 중간에 검은 건반이 두 개 있고 하나 건너 세 개,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것이다.
당시에 사내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난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자랐고, 음악적 환경은 당시의 평균 수준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즉, 가족친지 중에 음악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어렸을 때 장난감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에 피아노도 있었다. 물론 장난감 피아노였지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아이들은 검은 건반이 그림으로 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내 장난감 피아노에는 진짜 검은 건반이 있었고 소리도 났다. "젓가락 행진곡"도 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요도 검은 건반을 이용해 칠 수 있어서 기뻤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비에 젖지 않고도 이웃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공동주택이었다. 이웃에 사는 형이나 누나들이 나를 귀여워해서, 오르간도 치게 해주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 삼아 치던 피아노가 상당히 능숙(?)했던 것 같다.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은 초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내 부모에게 혼자 치는 것보다 레슨을 받는 게 좋다고 권유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분께 감사드린다.
이리하여 피아노와의 만남은 초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매주 한 번 정도 피아노를 접했다. 집에서도 발로 밟는 오르간을 사주셨다. 건반이 40개 정도 되는 오르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 댁에 있는 피아노는 음역이 넓은 것은 물론이요, 어찌나 음색이 아름답던지 나 같은 초등학교 저학년생마저도 신비한 매력을 느꼈을 정도였다. 선생님이 엄격하게 가르치시는 것만 빼면, 대체적으로 레슨은 재미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를 좀 더 잘 치게 돼서 페달을 사용해야 하게 됐을 무렵, 집안 사정도 좋아졌는지, 글쎄 피아노를 사주신다는 것이었다. 이 때는 앞서 말한 집에서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해서 살 때였는데, 1년 정도 지나자 피아노를 놓아둔 곳의 마룻바닥이 피아노 무게 때문에 아래로 조금 꺼져서 바닥이 콘크리트로 된 다른 방으로 옮겼던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집안사정이 어려워져서 피아노를 단념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친척분들과 담임선생님, 음악 선생님 덕분에 힘겹지만 피아노를 계속할 수 있었다.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편의를 봐주신 것이다. 그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지금 새삼 실감하고 있다.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가 비교적 음악 활동이 활발한 학교였던 덕분에 취미로 부담없이 하는 음악은 무척 재미있었다. 어려운 곡은 완벽히 칠 수 없었어도 피아노와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음악대학에 진학할 용기(?), 실력(?), 경제력(?)이 없어서 이과로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 처음에 필요에 의한 아르바이트로 대중음악 피아노 연주와 편곡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내가 뮤지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는 곁에 없었던 악기로서의 피아노를 다시 갖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할부로 구입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나는 피아노와 피아노 음악의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다.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나는 음악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그래서 20대에는 피아노와 관계된 음악이라면 어떤 장르든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특히 대중음악 일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마치 피아노로 무예를 연마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가항력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인간성이 미숙해서인지, 31세 때쯤부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사실 그때까지 내가 작곡한 피아노곡 작품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전보다 피아노에 정신을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어, 피아노 연주곡으로 적합한 곡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탄생한 곡들 가운데 ‘루이스 호수’가 있다. 중간부에서 재현부로 이동해가는 부분에서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 곡의 모티브는 마치 신의 계시처럼 번쩍 떠오른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신이 내린 계시일지도 모른다. (이 후로는 첫째는 노력, 둘째는 아이디어로 곡을 만들고 있다.) 유키 구라모토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곡 덕분이었고, 내 음악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곡도 이 곡이다.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작곡과 연주를 생업으로 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취미 차원에서 피아노와의 대화, 격투(?)는 계속되고 있다. 좋아하는 곡(꼭 피아노곡만은 아니다)을 느낌이 가는 대로 연주하거나, 내 기량으로는 도저히 남들 앞에서 연주할 수 없는 어려운 곡을 연습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연주실력 향상에 큰 효과가 있으니, 단순한 취미 차원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시간들은 내 개인적인 시간이고, 음악을 하는 행위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순수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은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비로소 "음악"이 소생하고, 그 의미가 배가된다는 것이다. 이런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나의 피아노 음악을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coda 2004년 4월호 p72 박나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