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은 스페인 카디스 성당의 위촉으로 성주간을 위한 명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원곡은 관현악곡이었지만, 작곡가 자신이 현악사중주를 위해 편곡한 버전이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 외에도 요제프 프리베르트가 텍스트를 붙인 오라토리오 버전, 피아노 독주를 위한 버전 등도 등장하였다. 본 오라토리오 버전은 2009년 11월 28일 로얄 페스티벌 홀에서의 실황을 담은 것이다.
2009년 11월에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실황으로 녹음된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하이든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은 대단히 독특한 연주다. 기본적으로 오라토리오 판본을 연주하면서도 각 말씀의 도입부에서는 최초 형태인 오케스트라 판본을 연주한 다음 오라토리오 판본을 이어나간다. 다만 첫 말씀인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에서는 오라토리오 판본만을 연주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실로 기묘한 혼합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보면 상당한 분량의 음악을 2번 듣게 되는 셈인데, 유로프스키는 내지 해설에서 오라토리오 판본이 이 작품의 참다운 위대함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 듣는 사람이 가사 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판본을 먼저 듣도록 함으로써 작품의 옛 영광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오케스트라 연주를 먼저 듣는 것이 감상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차라리 오케스트라 판본만 연주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유로프스키는 가뜩이나 느린 악장이 계속 이어지는 작품을 더욱 늘여놓은 것을 의식했는지 전체적으로 템포를 상당히 빠르게 잡고 있다. 사실 이런 구성에서 느린 템포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아무튼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의 열정 어린 노래와 잘 어울린다. 특히 1부보다는 2부가 더 훌륭한데, 유로프스키가 이끌어내는 긴박감과 역사주의 연주양식을 도입한 오케스트라의 성마른 음색이 절망감에 가득한 십자가 위의 말씀과 공명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다만 오케스트라가 빠른 템포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종종 눈에 띄며, 작품 곳곳에 배치된 불협화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재미있게도 마지막 지진 장면에서는 템포를 상당히 늦추고 장엄한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나름 효과가 있지만 오케스트라-현악4중주-피아노-오라토리오를 막론하고 마지막 악장에서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통상적인 해석이 좀 더 작품에 걸맞고 효과도 좋다고 본다.
종합적으로 볼 때, 런던 필하모닉의 뛰어난 연주력과 민첩하고 강력한 집중력, 내성부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균형감각에도 불구하고, 유로프스키의 대담한 시도가 작품의 폭넓은 가능성을 모두 이끌어냈다고는 볼 수 없다. 오라토리오 판본을 듣고 싶다면 여전히 슈페링(opus111)이나 아르농쿠르(Teldec)가 첫 번째 선택이다.
- 월간 La Musica - 이준형
[ 수록곡 ]
1. Introduction 1: Maestoso Ed Adagio
2. No. 1. Vater, Vergib Ihnen (Father, Forgive Them)
3. No. 2. Furwahr, Ich Sag' Es Dir (Verily I Say Unto You)
4. No. 3. Frau, Hier Siehe Deinen Sohn (Woman, Behold Your Son)
5. No. 4. Mein Gott, Mein Gott (My God, My God)
6. Introduction 2: Largo E Cantabile
7. No. 5. Jesus Rufet, Ach, Mich Durstet (Jesus Said, I Thirst)
8. No. 6. Es Ist Vollbracht (It Is Finished)
9. No. 7. Vater, In Deine Hande (Father, Into Your Hands)
10. Il Terremoto (The Earthqua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