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CD의 파트1(34분)의 1악장이 시작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지휘자 벤자민 잰더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2003년에 2월에 텔락에서 말러 교향곡으로만 네번째의 연주를 펼쳤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트롬본 솔로의 기개가 시원스럽고 멋지게 펼쳐집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평원의 기마부대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표지 사진의 잰더를 보십시오. 기마 부대를 호령하는 전투 대장같기도 합니다. 흰머리를 휘날리며 대군을 이끄는 잰더의 카리스마가 엿보입니다.(코가 큰 게 좀 거슬리지만)

천천히 그러나 무게 있게 악단을 이끄는 모습은 멀리서 먼지 가득하게 무언가가 달려오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잠시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이 구슬프게 나오기도 합니다만 곧 웅장한 저음에 묻혀 버립니다. 웅장함과 아련함이 교차하며 영혼마저 투명하게 해 줍니다. 웅장함 속에서의 이런 하늘거림은 투명한 하늘이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트롬본을 위시한 두툼한 음색과 금관악기의 시원한 울림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질서정연하게 말을 타고 입장하는 군사들이 연상됩니다. 승전가를 울리는 듯도 합니다. 흐트러지지 아니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웅장함이 귀를 즐겁게 합니다. 파트1의 마지막 부분을 휘몰아치는 잰더의 멋진 지휘도 감상 포인트입니다.(머리로만 상상하는 것이지만)
잰더의 이러한 면은 일부 다른 음반에 비해 너무 느리고 처진다는 식상함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말러의 다섯 번째 교향곡 녹음이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혹평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잰더가 지향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세부적인 악기 하나하나 살려가며 하나하나의 음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두번째 CD의 파트 2의 첫번째 2악장은 미뉴엣 템포로 부드럽고 감미롭습니다. 교향곡이라기보다는 봄날 소풍 나온 한 쌍의 나비처럼 한가롭기만 합니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을 따라 끝으로 끝으로 날아가는 자유로움입니다. 이상이며 진리입니다. 가벼운 음 하나 놓치지 않고 바람을 타고 흐릅니다.

3악장으로 들어가면 목관 악기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정답게 노닙니다. 2악장의 전개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곧 스케르찬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정녕 정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서늘하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4악장의 도입부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습니다. 볼륨을 한참 높이다보면 저 아래가 가냘픈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이슬방울이 가득하고, 호수 한 가운데에서 증기가 퐁퐁 올라오는 신비함으로 가득 찬 마법의 세계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티핀 보이즈의 소년 합창단이 노래하는 합창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맑고 투명하고 싱싱하며 통통거립니다. 이 세상의 어떤 가식이나 거짓이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영혼의 합창 바로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잰더는 여전히 느긋합니다. 마지막 피날레가 멋지게 울려퍼지지만 그 장대함은 여유로움과 환희로 조급하지 않습니다. 튼튼한 바위를 힘찬 물살이 뚫고 지나가는 듯 그렇게 감동적인 막을 내립니다.

잰더 음반의 특징은, 세번째 CD입니다. 그가 육성으로 장장 77분에 걸쳐 자신의 지휘관을 설명합니다. 중간중간 설명하는 악기들의 음을 들려줍니다. 영어가 짧아 다 듣진 못했지만 지휘자의 설명을 듣는다는 건 그가 얼마나 말러 지휘에 욕심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PURE DSD와 멀티채널 SACD를 강조하는 텔락의 말러 교향곡은 일반 CD로도 그 감동을 크게 느낄 수 있지만 아무래도 SACD 멀티 채널로 제대로 들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대로 들으신 분의 더 멋진 감상기를 기대해 봅니다. CD 3개를 담느라 SACD 음반치고는 투박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19쪽에 달하는 속지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잰더가 아홉 살 때 작곡을 했다고 나오는군요. 조만간 잰더의 말러 전집이 나올 것도 같습니다. 코가 큰 잰더가 멋있어 집니다. 그의 다른 말러를 듣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