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특정 제목이 붙은 피아노독주 앨범을 구입하기는 처음이다. 예전에 LP시절에 라이센스 판으로 그의 피아노협주곡 1, 2번과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독주곡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많이 듣지도 않았고 그저 처음 구입하고 몇 번 듣다가 LP는 모두 처분한 지가 오래 되었고, CD로는 오래전에 구입한 여러 연주자가 연주한 피아노 모음곡(수입반) 1장이 있다. 그 음반에는 그의 왈츠, 전주곡, 폴로네이즈, 연습곡, 즉흥곡, 론도 등이 수록되어있다. 쇼팽의 피아노곡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왜 구입을 하지 않았는지는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 RCA 리빙 스테레오에서 좋은 가격에 쇼팽의 독주 피아노곡과 협주곡이 나온 것을 보고 냉큼 냉큼 주문부터 하였다. 그리고 배달 온 독주 음반을 들었는데 듣자마자 감동부터 먹었다. 이전에 듣던 쇼팽의 독주곡에 비하여 너무나 뚜렷한 음상과 아름다운 선율 강약의 완급조절 등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좋은 연주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46년 전 루빈스타인이 노년기에 녹음한 음반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음질이었다. 이는 아마 연주자의 능력과 CD의 음질이 상승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루빈스타인이 궁금하여 쇼팽과 아더 루빈스타인을 찾아 인터넷을 뒤져보니 루빈스타인은 20세기 최고의 쇼팽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은 이것으로 접고 평론가의 평을 대신 적는다.
발라드
원래 발라드란 중세시대의 영웅서사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래 자유로운 형식으로 된 짤막한 노래이다. 쇼팽은 이것을 독자적인 형식과 시적인 내용을 지닌 피아노곡으로 작곡하여 발라드란 명칭을 붙였다. 전4곡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1번과 제3번이 특히 유명하다. 가장 규모가 작은 제2번, 귀족적 취미가 짙게 풍기는 제3번,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제4번에 비해, 제1번은 쇼팽의 전성기 작품으로, 4곡 중 코다가 가장 장대하고 극적이다.
루빈스타인은 어찌된 일인지 70이 넘어서야 이 발라드를 처음으로 녹음했다. 이것은 그의 유일한 발라드 녹음으로, 젊은 시절의 정열이 넘치는 쇼팽 연주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 대신 만년의 내성적인 사색의 깊이가 느껴지는 명연이다. 호로비츠와 함께 그는 20세기의 비르투오소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따라서 흔히 기교적인 연주에서 그의 특징을 찾는 경향이 강하지만 만년의 루빈스타인의 연주에는 보다 담백한 표현에 인간적인 원숙함이 깃들어 있다. 이 발라드에서도 그런 루빈스타인의 특징은 잘 반영되고 있다. 루빈스타인은 무엇보다도 구조적인 명확함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원전에 가장 충실하면서도 개개의 프레이즈의 묘사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이 연주를 들으면 우선 스케일이 크다는 점에서 압도당하게 되는데, 특히 각곡이 지닌 독특한 세계를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도 특필할 만하다. 그의 연주는 언뜻 들으면 특징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세련되고 유례없이 독특한 개성이 담겨져 있다.
스케르초
베토벤 이래의 스케르초 형식에 대해 쇼팽은 자유로운 착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결과 템포가 빠르고 격정적인 4곡의 스케르초를 작곡했던 것이다. 이 스케르초는 쇼팽의 내재된 미학이 잘 표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처음 3곡은 내면적인 어둠이 가득 차 있어 황량하면서도 아름답고, 나머지 1곡은 기교적인 격렬함이 있긴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온화한 작품이다. 4곡 중 유명한 것은 제2번이다. 제4번은 유일하게 장조로 쓰여졌다.
이 곡의 역사적 명연으로 루빈스타인의 RCA판을 꼽는 사람이 많다. 장대한 스케일의 울림이 풍부한 연주이지만, 아주 스탠더드한 해석이다. 정적인 요소와 동적인 요소의 대비를 명확히 하면서 뛰어난 기교를 구사, 지극히 장려한 쇼팽을 들려주고 있는데, 특히 제2번의 아름답고 온화한 표현이 돋보인다. 같은 폴란드 태생이어서인지 루빈스타인이 쇼팽에게 보이는 친밀감은 각별하다. 심각한 구석이라곤 별로 없는 것이 그의 연주의 특징이지만, 이 스케르초에서는 음악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메시지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아무튼 루빈스타인의 70대 시절의 연주로, 거장다운 풍격과 여유와 함께 원숙함이 느껴지는 호쾌하기 짝이 없는 쇼팽이다.
